삽질하다 들것에 실려나간 '휴머노이드'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기지(Marine Corps Base Quantico) 들판에서 로봇 ‘알렉스’가 삽을 들고 땅을 파려다 균형을 잃었다. 로봇은 걸어서가 아니라 들것에 실려 시연장을 빠져나갔다. 할리우드가 약속한 강철 보병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장면이다.
그런데도 이 로봇은 이번 대회에서 우승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5개 우승작 가운데 ‘두 발로 걷는 완전한 로봇’이라 부를 만한 건 이 알렉스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네 팀은 전원관리 장치, 손끝에 붙이는 촉각 센서, 로봇을 지휘하는 소프트웨어로 상을 받았다. 군이 콴티코에서 확인한 건 '로봇 보병'이 아니라 로봇을 완성시키지 못하게 막는 부품들의 민낯이었다.
사실관계만 정리하면 이렇다. 미 육군 퓨즈 엑스테크 프로그램(Army FUZE xTech Program)과 합동군 휴머노이드 공동협력체(Humanoid Community of Collaboration, HCoC)가 공동 주관한 엑스테크휴머노이드(xTechHumanoid) 경진대회에서 103건의 제안서 중 10개팀이 결선에 올라 각 2만5000달러를 받았고, 이 중 9개팀이 실제 로봇을 들고 콴티코에 나타났다. 9월 11일 ACES Group, 플로리다 인간기계인지연구소(IHMC) 로보틱스, 하이드로플레인 리미티드, 라스랩스, 벨로시티 익스플로레이션스가 최종 우승팀으로 뽑혔다.
로봇이 아니라 부품이 이겼다
겉으로 보면 미군이 전투 로봇을 고른 그림이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다르다. 우승작 5개 중 4개가 로봇의 몸체가 아니라 몸속 장기였다. ACES Group·하이드로플레인·라스랩스·벨로시티 익스플로레이션스는 각각 전력·촉각센서·지휘통제 소프트웨어로 상을 받았을 뿐, 걷는 로봇을 내놓은 곳은 없다. 유일하게 완성형을 들고 나온 IHMC의 알렉스조차 해군연구청(Office of Naval Research, ONR) 예산으로 수년째 굴러가는 연구 플랫폼이지 판매 가능한 제품이 아니다. 키 1.79m, 무게 85kg, 29개의 자유도를 가진 이 로봇은 야전에서 자갈밭과 미끄러운 바닥을 걷는 시연까지는 해냈지만 삽질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로버트 그리핀 IHMC 로보틱스 수석연구원의 말이 이 격차를 압축한다. 그는 “제시된 개별 요구사항들은 어느 하나를 보더라도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시속 28마일로 달리면서 50파운드를 짊어지고 24시간 작동하는 로봇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건 없어요”라고 덧붙였다. 육군이 내민 요구조건 목록을 업계 당사자가 스스로 비웃었다는 사실이, 어떤 외부 비평보다 정직한 기술 격차의 증언이다.

49만 달러짜리 시장 조사
상금 49만 달러를 걸고 대회를 열었다고 하면 뭔가 조달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읽히기 쉽다. 실제로는 다르다. 같은 시기 민간 휴머노이드 스타트업 피규어AI는 10억 달러를 시리즈C로 유치하며 기업가치 39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군의 49만 달러는 그 돈의 2000분의 1도 안 된다. 최대 125만 달러 규모의 후속계약 재원이 더 있다지만, 육군은 각 우승팀이 정확히 어느 등급(기본형 각 7만5000달러, 서브시스템 각 3만 달러)을 받았는지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전문매체 Army Recognition은 이 선정 자체가 조달 결정이 아니라 유망 기술을 추려보는 통로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숫자를 이어 붙이면 그림이 또렷해진다. 103건의 제안서 중 10개팀, 그중 9개팀 시연, 5개팀 수상이라는 흐름은 승자를 뽑는 절차라기보다 깔때기를 통과시키며 시장의 체온을 재는 절차에 가깝다. 알렉스 밀러 미 육군 최고기술책임자는 “엑스테크는 수년이 걸리는 연구에 발목 잡히지 않고 업계 지형을 조사해 유망 기술을 신속히 발굴하는 우리의 방법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조달이 아니라 지도 그리기라는 뜻이다.
미국의 경연대회, 중국의 공장
미국과 중국 모두 군사용 휴머노이드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레이스처럼 보인다.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미군은 상금 49만 달러짜리 경진대회로 기술을 발굴하는 반면, 중국은 이미 세계 휴머노이드 출하량의 약 95%를 차지하는 산업 기반 위에서 움직인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조달 공고·학술논문·특허 등 100건이 넘는 자료로 휴머노이드의 군사적 활용 연구를 밀어붙이고 있고, 중국병기공업집단인 노린코(Norinco)가 내놓은 로봇 ‘푸시(伏羲)’는 이 흐름이 학계를 넘어 방위산업으로 번진 사례로 꼽힌다. 중국 군 전문가들은 건물소탕용 전투로봇의 실전 투입 시점을 5~10년 뒤로 내다본다.
다만 이 그림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로이터는 중국이 무장 휴머노이드를 실전 부대에 배치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밝혔고, 중국 군사평론가 쑹중핑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그저 하나의 눈길 끌기용 수단일 뿐이며 실제 전장은 이미 다른 무인체계가 주도하고 있다고 깎아내렸다. '로봇 보병의 시대'라는 제목은 아직 양쪽 모두에게 과분하다.
이번 대회에 한국 기업의 이름은 없다. 직접적인 수주나 계약 연결고리도 없다. 다만 같은 휴머노이드 생태계 안에서 삼성전자(레인보우로보틱스 최대주주)와 현대자동차그룹(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 80퍼센트 보유)이 경쟁하고 있고, 한국 육군은 레인보우로보틱스와 현대로템이 함께 만든 전투용 4족보행 로봇 RB-01K를 2026년 하반기 전방에 배치한다. 미군이 콴티코에서 재본 전력밀도·센서·탄도 방호 같은 기준은 언젠가 한국 기업의 군수용 응용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같은 생태계를 공유한다는 정도의 간접적 연결에 그친다.
미군이 이번에 산 건 로봇이 아니라 '시간'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번 대회의 진짜 구매 품목은 완성된 로봇이 아니라 향후 몇 년간 무엇에 투자할지 결정하기 위한 정보다.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상금 49만 달러와 후속계약 최대 125만 달러를 합쳐도 민간 휴머노이드 한 차례 투자유치에 턱없이 못 미친다. 이건 구매의 돈이 아니라 정찰의 돈이다. 둘째, 우승작 5개 중 4개가 완성형 로봇이 아니라 배터리·센서·소프트웨어였다는 사실 자체가, 육군이 지금 당장 로봇의 겉모습보다 로봇을 굴러가게 할 하부구조의 성숙도를 더 급하게 재고 있다는 뜻이다. 터미네이터를 사려던 게 아니라, 터미네이터를 만들 때 누가 어떤 부품을 갖고 있는지 지도를 그리려던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판에서 가장 남는 장사를 하는 쪽은 완성형 로봇을 만든 IHMC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하부 시스템 업체들일 수 있다. 완성형 로봇은 여전히 수백만 달러짜리 연구 프로젝트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배터리·센서·소프트웨어는 상용화 경로가 더 짧고 더 많은 고객에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내 판단이 틀렸다면, 그건 125만 달러 후속계약이 예상보다 빠르게 특정 팀, 특히 알렉스 쪽에 집중되고 이후 탄도 방호 기준까지 구체화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 대회는 정찰이 아니라 사실상 조달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는 뜻이 된다.
지켜볼 세 가지 신호
- 미 육군이 최대 125만 달러 후속계약 재원 중 일부를 실제로 특정 우승팀에 지급하는지 여부 — 2026년 말에서 2027년 사이 확인되면, 이번 대회가 단순 정찰을 넘어 조달의 전 단계였다는 뜻이 된다.
- IHMC 알렉스의 추가 야전시험과 탄도 방호 기준·자율성 비율 공개 — 2027년 상반기, 완성형 로봇이 실전 요구조건에 얼마나 가까워지는지 가늠할 잣대다.
- 중국군의 건물소탕용 전투로봇 실전 배치 시나리오 진전 — 앞으로 수년간, 5~10년 전망이 현실이 되는지 과장이었는지를 가르는 중간 점검이다.
대표 사진 — 미 육군 · Connor Taggert
본문 사진 — 미 육군 · Connor Tagg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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